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스부르고 왕조 (문단 편집) === 가톨릭 이데올로기 ===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가톨릭 신앙의 강조이다. 이에 따라 개신교도와 유대인 및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사실상의 스페인 왕국 성립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에 두드러졌다. 따라서 세간에서 중근세의 종교적 광신을 언급하는 데 스페인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스페인 종교재판]]같은 유머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스페인 내에서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미서전쟁]] 등을 계기로 추락하는 자국의 위상과 [[유럽]] 세계의 [[근대화]]를 목도한 [[지식인]]으로부터 몰락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톨릭에 대한 광신에 찬' 압스부르고 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일례로 1948년에 [[프랑코 정권]]을 피해 망명해 있던 역사학자 아메리코 카스트로는 España en su historia[* 영어권에는 The Structure of Spanish History, '스페인사의 구조'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를 출판하면서 '''이슬람을 몰아낸 가톨릭 공동왕과 그 이후 압스부르고 왕조는 종교적 폐쇄성과 광신으로 인해 실패한 체제'''라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가톨릭 신앙 강조는 펠리페 2세의 개인 성격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정체성이 가톨릭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왕국|아라곤]], [[나바라 왕국|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 진 나라이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나라로 통일 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이 다른건 물론이오, 당장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아라곤령에서 지방 관리들이 종교 재판관들의 마을 출입 등을 불허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때마다 내새운 명분이 외국인 관리들의 불법 침입이라는 점만 해도 그렇다.]. 당장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플랑드르,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재위 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란 나라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체로서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으며,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역사적 문맥에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보다 50년 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시스네로스 추기경 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 이게 그 유명한 콤플루텐스 성경으로, 기독교 초창기 성 예로니모가 발간한 불가타 성경 이전 유럽에서 최초로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재번역한 판본이다.], 알칼라 대학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 그나마 프랑스 내에서도 devots, 즉 '신실파'라 불리는 친스페인 급진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전쟁 이후 리슐리외의 집권 까지 프랑스 정계 내의 큰 한 축이었다.] 스페인의 리더십을 따른 건 신앙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 또한 크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 중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은 스페인 외의 가톨릭 국가에도, 그리고 개신교 국가에서도 똑같았다.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개인들'의 신앙을 쇄신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를 쇄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개혁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상이였고, 타 종파는 묵인될 수 있을지언정 관용되지는 않았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창안된 [[루터교]]를 제외하면, [[종교개혁]] 운동은 사회 운동으로의 성격도 같이 띄고 있었다.]. 이 점은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같았다. 종교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종교가 달라? 이단이라고? 그럼 죽여야지!-- 네덜란드,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독일의 자유시처럼 흔히 '종교적 관용'의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 역시도 대동소이했는데, 네덜란드의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묵인되는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묵인이었을 뿐이지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의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건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 신앙이 금지에서 풀린 건 1853년부터이다. [[30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나 작센 선제후국처럼 동시대에 종교적 여건과 분리된 실리 추구 정책을 폈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처럼 종교적 관용이 그 특징인 동시대의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유럽 세계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들로, 스페인과 비교하기엔 어렵다. 개신교권의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스웨덴]], 가톨릭권의 남부 독일 등 스페인 욕할 처지가 못되는 지역은 넘쳐난다. 그리고 현대적 가치관에서 위의 국가들은 관용과 다양성의 긍정적 선례로 평가받지만, 전성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가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령 헝가리]]의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카자크|코자키]]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국력의 막대한 부분을 손실했다 [* [[대홍수(역사)|대홍수]]를 불러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자키 대봉기도 그렇고, 반왕실 반란들이나 [[스웨덴]], [[루스 차르국]]이 연루된 왕위 계승 전쟁들 같은 동시대 이중 공화국의 국내외 분쟁들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가 있었고, 충분히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정치적 차원에서 교섭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 넘어 갈 수 있었던 문제들도 종교적 단초가 들어가 더 격렬한 분쟁으로 심화 되는 등, '관용을 통해 종교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중 공화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유럽]] 사학계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현대에는 거의 논파된 테제이다.].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관용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되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경제적 이유로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된 것이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고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반가톨릭]]/반유대인 폭동은 빵값 오를 때마다 주기적으로 터졌다. 게다가 종교개혁 시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반격의 핵심이 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주교의 자기 교구 주재, 대사 문제, 사제 교육 등 많은 법규 자체가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키배를 벌여 규정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페인의 이단심문 희생자 숫자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곤 했는데, 이를테면 지금도 돌아다니는 "스페인 이단심문에 40만이 희생되어..." 라는 레파토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이 당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더 광신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스페인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154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5.1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였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1700년도까지를 기준으로 할 때, 스페인에서 이단심문+마녀사냥으로 죽은 사람을 모조리 합쳐서 최대한도로 올려잡아도, 그리고 통계가 빠진 1531~1540년의 사형 희생자를 연간 40명으로 계산해도, 인구가 훨씬 적은 스코틀랜드에서 1590년부터 1680년까지 마녀사냥으로 처형한 숫자(4400명)보다 적다. 씨앗 줍기나 영주의 사냥터에서 밀렵, 지역사회 내 파벌 싸움 때문에 극형을 훨씬 더 자주 남발한 세속 법정보다 훨씬 더 온건했던 편이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 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마녀재판에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 >「종교개혁」, 피터 마샬(Peter Marshall)[*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 스페인의 이단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으나 타 국가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라 하긴 힘들었고, 마녀재판에는 회의적이였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가장 끔찍하게 마녀를 사냥하던 지역 중 하나이다. ~~스페인은 억울하다~~ 그리고 혹시나 오해할까 봐 강조하자면, 피터 마샬은 영국의 역사학자다. [[파일:Helen_Rawlings_The_Spanish_Inquisition.jpg]] [* 출처: Helen Rawlings, ] 이 이미지에서 보듯, AD 1540-1700의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826명의 사망자가[* 1604명을 사형시켰는데, 그중 778명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고 826명이 사람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루터교, 비공인 영적계시[* Alumbrados, 영어로는 Illumnist 라고 하는 15, 16세기 특히 귀족 여성층 사이로 유행했던, 영적으로 특출난 사람은 교회의 개입 없이 직접 하느님과 교접할수 있다 주장하던 신비주의 집단이다. 당연히 교회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반하는 주장인데다가 개신교스러운 색이 풀풀난다는 이유로 탄압당했다. 그러나 현대 와서는 바르톨레메 베네사르, 조세프 페레즈 같은 종교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알룸브라도가 사실 구체적인 하나의 의식적인 집단이 아니라, 그냥 당시 영적 계시 같은 신비주의적 풍토가 강하던 카스티야 가톨릭 교회에서 어찌 교회와 대놓고 충돌하진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신앙을 강조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시성까지 된 반면, 도저히 교회의 정식 가르침 내에서 받아줄수 없을만큼 막나갔던 영적 신비주의자들은 찍어 누르고 탄압하기 위해 법적, 행정적으로 '''만들어낸 집단'''이란 설도 유력하다.], 이단은 아니지만 교회의 정식 가르침에 반하는 종교적 의견(propositon), 중혼(bigamy), 교사죄(Solicitation), 미신(Superstition) 등을 합쳐서 발생했을 뿐이다. 해당 항목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proposición은 엄밀하게 따지면 개신교나 이슬람, 유대교 같은 다른 종교, 이단과의 연결점은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쨌든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는 신앙관을 마음대로 설파했던 행위를 말한다. 이 시대 종교재판소 판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편인 가장 전형적인 예로선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가볍게 [[혼외정사]]하는 건 대죄가 아니다', '뱃사람이 외국에 나가 있는데 현지처 좀 만들고 할 수 있다' 같은 주로 성, 가정 윤리를 다룬 내용이다. 그리고 종교재판소는 현대의 형사법 체계처럼 자체적으로 죄인을 찾아 기소하는게 아니라, 순회 재판소로서 타인의 밀고나 인근 일대 마을 사람들 모아둔 공공장소에서 가벼운 처벌, 용서를 약속한 댓가로 이루어지는 자백이 있어야만 성립했다. 원래 종교재판소의 기원이 된 유대교, 무슬림 출신 가짜 개종자 탄압은[* 알함브라 칙령 이후 아예 개종도 안 하겠다고 버티는 유대인, 무슬림들은 종교재판소의 관할이 아니라, 그냥 추방 대상이었다. 종교재판소가 담당했던 건 어디까지나 말로만 개종해놓고 뒤로는 유대교, 이슬람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거짓 개종자 색출이었다.] 해당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 몇몇 시기에만 국한되고, 나머지 희생자 대부분은 이렇게 자체 분류가 안된 '비공식 이단 (informal heresy)'에 속했다는 걸 보면 종교재판소의 역할이나 실제 돌아가는 모습은 현대 국가의 [[정치경찰]] 같은 무시무시한 세뇌와 공포정치의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들끼리 서로 지역 사회의 이권이나 다툼이 생겼을때 꼬투리 잡아 밀고하는 민사재판소에 더 가까웠다는걸 보여준다. 물론 원래 종교재판소 설치와 확대를 추구한 가톨릭 공동왕, 황제 카를로스,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중구난방의 주술적, 미신적 종교행위를 없에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공식 신앙관과 예법을 강제할 기관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목적, 교권을 통한 왕권 강화적 의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종교재판관들이 왕실과 세속 정부에 그리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도 않았고,[* 원칙적으로 최고심문관(Suprema, Inquisidor general) 임명을 포함한 전반적인 통제권은 로마가 아니라 스페인 왕실에 있었지만, 어쨋든 신앙을 담당하는 부서인 만큼 교황도 어느 정도 보고를 받고 간섭을 할 권한이 있었다.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았고, 이런 애매모호한 종교재판소의 성격은 분명 주권 자체는 세속 왕실 정부에 있지만 그 정당화 기제, 행정 인력, 통치 인프라 같은 정치의 핵심적인 면에서 교회와의 긴밀한 협조에 의존한, 반쯤 신정국가적이었던 당시 스페인 국체의 미묘한 정체성의 상징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일반적인 스페인 마을사람들은 평생 한두번 볼까말까한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리고 종교재판소가 상징하던 당시 스페인의 국가가톨릭주의 이념을 현대의 관점에서 '낙후된 중세의 유물'쯤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종교재판소란 기관 자체가 상당히 '근대적'이었다. 유럽에서 거의 최초로 고문의 강도와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횟수[* 흔히 피칠갑 고어 고문쇼 일색으로 묘사하는 훗날 네덜란드와 영미 같은 적대적인 개신교권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와 달리, 당시 스페인 종교재판소에서 고문은 첫 재판 이전 딱 한 번만 할 수 있었고, 고문'만'을 통해 얻은 자백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도 안되고, 고문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얻어낸 자백이나 다른 결정적 증거, 증언이 동반돼야 정식으로 기소할수 있었다. 서양권에선 나름 유서 깊은 스페인 가톨릭 폄하 사관(La leyenda negra, Black Legend) 말마따나 종교재판소가 그냥 스페인 왕실과 폭압적인 가톨릭 교회가 같이 손잡고 종교를 통해 백성들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관이었다면 이렇게 정교하면서도 오히려 재판소 측에 불리한 규정과 조항을 만들지도 않았다.], 취조 방식과 상황에 따른 증언의 진실성, 소속 감옥의 위생과 청결 같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죄수 인권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한 법정 체계가 당시 스페인 종교재판소이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 법대를 나온 전문 관료 집단(letrado)이 대거 참여했던 조직적 성격을 반영하여 매우 체계적이고 자세한 문서화된 기록 체계를 남겨 지금까지도 당시 스페인과 중남미의 사회상, 종교문화, 정치와 교회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 컬렉션을 남기기도 했다. 근본적인 목적이 그릇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다 때려 죽이자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정통 신앙관을 주입하여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하는 사목적 기관이었던 만큼, 여전히 교화보다 그냥 처벌을 중요시하며 극형을 종종 내리던 당대의 세속 재판소와 달리 어느 정도 교화와 죄수의 인권에 신경썼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면도 있었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정신나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린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뿐만 아니라 사실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와 관련된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 졌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특별한 케이스 몇몇을 유럽 전반에 대입하면 곤란하다. 되려 이 종교적 관용의 가장 큰 사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17세기 초반 이후 중앙에서 포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중앙 권력 자체가 없으니) 사회적인 차원에서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한 차별이 만연해 졌고, 시기스문드 3세의 치세 때는 이러한 중앙 권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철회해야 됐다. 유럽 전체의 정치적인 구조 자체가 중세적 느슨함에서 근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전환하던 전근대 시기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큰 여건을 거스르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교 분리란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스페인은 종교에 비관용적이었지만, 유럽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비관용적이였다는 편견은 부당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